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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얻은 운전면허증은 몇 년 동안 내 화장대 서랍 속에서 고이 잠자고 있었다. 친구들이 다들 면허를 땄기 때문에 덩달아 운전을 배운 거지 실제로 차를 몰고 거리에 나설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부족함이 없었고, 세상은 차를 몰지 않는 '여자'에게는 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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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몇 달, 다음날 어딘가로 차를 몰고 갈 일이 있으면 걱정이 돼서 전날 밤을 꼬박 새곤 했던 나는 어느새 차가 없으면 불편해서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운전을 즐기게 돼버렸다. 차를 막 샀을 때 주변 사람들은 내게 "앞으로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들 말했지만 운전이 너무나 무서웠던 나는 내게도 그런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의외로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운전이 익숙해지고 나자 생활이 훨씬 더 편리하고 윤택해진 것이다. 추운 날 밤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할인마트에 가서 생필품을 잔뜩 사올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굉장히 독립적이고 당당해졌다.
 운전을 하기 전의 나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의존적이었다. 남자친구를 사귈 때도 언제나 그와 함께 그의 '차'가 필요했다. 남자친구는 내게 나를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 주는 존재, 주말에 나를 차에 태워 바람을 쐬게 해주는 존재, 무거운 짐이 있을 때 차에 실어 날라다주는 존재였다. 운전을 할 줄 아는 '그'는 관계의 우위에 있었고, 운전을 못하는 '나'는 어느새 종속적 인 존재로 전락했다. 그런데 운전을 하게 된 지금은 굳이 차가 있는 남자를 만나지 않아도 혼자서 충분히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폴란드 출신 여성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Tamara de Lempicka) 의 1925년 작 [자동차를 탄 자화상]은 '근대여성'의 대표적인 아이콘처럼 여겨진다, [녹색 부가티를 탄 타마라]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그림은 1925년 독일의 패션잡지 [디 다메]의 표지로 세상에 등장했다. 녹색의 고급 승용차에 올라탄 그림 속의 여인은 장갑 낀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도도한 눈빛으로 관람객을 응시한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굳게 다문 입술에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당당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림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렘피카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자유로운 여자였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근의 본명은 마리아 고르스카. '렘피카'라는 이름은 첫 남편의 성인 '렘피키'를 변형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살다가 1917년 남편이 볼셰비키 혁명과 연루되자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그녀는 미술 학교에 압학해 그림을 배웠다. 당시 파리를 풍미했던 큐비즘의 영향이 그녀의 그림에서 어렴풋하게 드러난다.

렘피카는 몬테카를로에서 차를 몰고 가던 어느 날 우연히 [디 다메]의 패션 기획자와 마주쳐 "운전하는 당신의 모습이 아주 멋지니 그 모습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당시 렘피카가 몰고 있던 차는 노란색 르노였고, 입고 있던 옷도 노락색 풀오버였지만, 렘피카는 단 한번도 녹색 부가티를 소유한 적이 없었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녹색 부가티를 탄 자신을 그렸다.'

혹자는 이를 일러 거침없는 남성 편력과 양성애로 당시 사회의 이목을 끌었던 그녀답게 자유분방하고 과장된 행동 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운전에 막 재미를 붙인 나는 그녀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마음속에 그렸던 운전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는 평범한 르노가 아니라 고급 부가티를 몰고 있는 것만큼이나 근사하고 당당했던 것이다.

혼자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달릴 때,
나는 옆구리가 찌그러진 아반떼가 아니라 벤츠라도 타고 있는 것처럼 우쭐해진다.
겁 많고 의존적이기 그지없던 내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 무겁고 거대한 기계를 조작해
세상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림이 그녀에게_ 곽아람 ] 중


서문만 읽었을 땐 그저그런 유치한 책이군 싶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참 공감가는 글들이 많았던 책이었다.
 '녹색 부가타를 탄 자화상'은 요즘 특히 공감되는 글이라서 옮겨왔다.  나에게도 올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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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mpty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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