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도서관에 갔다가, 화장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행색이 초라한 어떤 아저씨가 남자 화장실로 다가가서 노크해 보더니 인기척이 들리자 'Take your time~!' 이라고 크게 외치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러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찡긋해 보이더니 아예 근처 소파에 자리를 잡고 뒤로 푹 기대어 양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틀 전엔, 우리 집 앞을 관통하여 시내를 지나는 전철, B-line 철로에 차가 덥치는 바람에 전철역 몇 구간이 운행을 중단하여 전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셔틀버스를 타고 정상 운행을 하는 전철역까지 옮겨가야 하는 일이 발생 했었다(멀쩡한 차가 왜 철로를 들이 박았는지 알 수 없다. 다음날 메트로 신문에 이 사건이 실렸었는데, 운전자는 다치지 않았다는 말만 있었다). 하필 나도 소율이와 그 전철을 타고 있었는데, 내가 유모차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셔틀을 먼저 타도록 해주었더랬다. 그런데 뒤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 했던 모양인지, 직원 아저씨가 유모차 올리는 것을 도와주며 "Take your time"이라는 말 한 마디를 건넸다. 그 말 한 마디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좀 부끄럽기도 했다. '허둥지둥 하는 게 다 보였구먼...-.-' 하는 마음에)
언젠가, 식료품 가게에서 백발이 성성한 어느 노부인이 느릿느릿 짐을 챙겨 나가는데 점원이 'Take your time, as long as you want' 라고 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Take your time' 이라는 말, 참 고마운 말이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하셔도 되요' 이쯤 될텐데... 한국에서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특히 관공서에서 줄이 길게 늘어선 경우엔, 좀 꾸물거리다 보면 직원의 눈치를 받기 십상이다. 버스 기사 아저씨도 '빨리 빨리!, 뒤로 들어가세요'를 외칠 뿐, '천천히, 조심히 타세요'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기야 사람들이 잘못이겠는가, 사회 시스템이 그런 것을... 우리 나라에서 일 처리 속도가 놀랍도록 빠르다는 것을 이곳에서 새삼 느꼈다. 빠른 서비스를 즐길 수 있지만, 동시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항상 등 떠밀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꾸물거리거나 뭘 빨리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답답함에 가슴을 치던 사람이다. 그랬던 내가, 이젠 '민첩한 무리' 보다는 '꾸물거리는 무리'에 가까워져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느릿느릿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함 보다는 애처러운 마음이 먼저 일어서, 그들이 일을 무사히 마치는 것을 숨 죽이고 지켜본 다음에야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간다.
소율이가 자라고, 내가 다시 바쁜 사회인이 된다 해도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을 기꺼이 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음... 생각해보니 멀리 갈 것도 없구나. 소율이에게 '얼른!, 빨리!'나 외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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