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내 동생 홍차와 전화통화를 하였다.
홍차는, 엄마가 '무소유'를 읽고 싶어하시는데 법정 스님께서 별세하신 후에, 그 책이 인쇄가 중단되었기 때문에(그 분의 유언대로) 중고 책도 7만원을 웃돈다는 소식을 전했다. 찾아보니 내가 작년 여름에 한국에서 가져왔는지 여기 책꽂이에 꽂혀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좀 정리하고, 정리가 끝나는대로 엄마에게 보내드릴까 보다. 책주인 YY에게 허락을 구하고...
비독서지절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그와 같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쓰여진 게 아니라 우주의 입김 같은 것에 의해 쓰여졌을 것 같다.
가을은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너무 일찍 나왔군 똑같은 조건 아래서라도 희노애락의 감도가 저마다 다른 걸 보면, 우리들이 겪는 어떤 종류의 고와 낙은 객관적인 대상에 보다도 주관적인 인식 여하에 달린 것 같다. 아름다운 장미 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시에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흙과 평면공간 그러던 어느날 그 흙탕길을 걸으면서 문득 생각이 피어올랐다. 잘 산다는 것은 결코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우리는 보행의 반경을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차단된 시야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동작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활발한 사고 작용도 따른다. 툭 트인 시야는 무한을 느끼게 한다.
그곳에는 수직 공간은 있어도 평면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이웃과도 온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속의 얼굴들도 서로가 맨숭맨숭한 타인들.
탁상시계 이야기 지난해 가을, 새벽 예불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법당 예불을 마치고 판전을 거쳐 내려오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도둑이 다녀간 것이다. 평소에 잠그지 않는 버릇이라 그는 무사통과였다. 살펴보니 평소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 갔다. 내게 소용된 것이 그에게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남긴 것이 더 많았다. 내게 잃어버릴 물건이 있었다는 것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물건이란 본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기 마련이라 생각하니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남의 것을 훔친 그 과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빚이라도 갚고 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는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가 싶어 있는 것 없는 것을 샅샅이 뒤져 놓았다. 잃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석하지 않았느데 흐트러 놓고 간 옷가지를 하나하나 제자리에 챙기자니 새삼스레 인간사가 서글퍼지려고 했다.
당장에 아쉬운 것은 다른 것보다도 탁상에 있어야 할 시계였다. 도군이 다녀간 며칠 후 시계를 사러 나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을 허름한 것으로 구해야겠다고 작정. 청계천에 있는 어떤 시계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허허, 이거 어찌된 일인가. 며칠전에 잃어버린 우리 방 시계가 거기서 나르 ㄹ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웬 사내와 주인이 목하 흥정 준이었다.
나를 보자 사내는 슬쩍 외면했다.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못지않게 나도 당황했다.
결국 그 사내에게 돈 천원을 건네주고 내 시계를 내가 사게 되었다. 내가 무슨 자선가라고 그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어슷비슷한 허물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인데. 뜻밖에 만난 시계와의 인연이 우선 고마웠고, 내 마음을 내가 돌이켰을 뿐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회심기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 여름에 읽은 책 읽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
잊을 수 없는 사람 구도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가 아님을 그는 깨우쳐 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녹은 그 쇠를 먹는다
일의 위대성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점일 것이다. 일을 통해서 우리는 맺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