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전 한 닢

Books 2010. 5. 6. 09:32
고등학교 때 재미있게 읽었던 수필이다.


은전 한 닢_피천득

내가 상해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 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좋소."
하고 내어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돈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었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거친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및에 쪼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어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원짜리를 줍니까? 각전(角錢)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 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다양[大洋]'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
 

봄학기 영어 수업을 같이 들었던 친구들 중에 다음 레벨로 옮겨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보이던 몇 명이 있었다. 그 친구들 중 어떤 이는 이번 레벨을 두번이나 들었다며 다음번에도 등급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다고 강한 불만을 토로 했었다. 내 경험으로는 이전 레벨이나 지금이나 수업 내용에 별 다른 차이는 없고, instructor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말이다.  
 
어제 드디어 시험 결과가 나왔고, facebook을 보니 이미 친구들은 서로의 점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특별한 Certification이 있는 수업도 아니고, 가장 높은 레벨에서 공부를 한다 하여 누가 알아 줄 것도 없는데 이러는 게 좀 우습기도 하고...
그러다가 피천득의 '은전 한 닢'이 생각나서 찾아보았다.
그저 은전 한 닢이 가지고 싶었던 거지와 높은 레벨을 얻는게 목적인 학생들, 둘 모두 수단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런 글을 쓰고 있다하여 내가 '수단의 목적화'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고...

나로 말할것 같으면 성적이 살짝 올라서 그냥 제자리 걸음이다. 어느 레벨에 있든 항상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에 등급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없지만, 한 친구가 다음 레벨로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니, 새삼 쉬지 않고 정진하리라는 결심이 솟는다. 역시 질투는 나의 힘이다.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Charlotte's Web  (0) 2010.08.30
구름빵  (2) 2010.07.19
나를 부르는 숲  (1) 2009.12.14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0) 2009.12.07
Menachem's Seed  (0) 2009.10.25
Posted by emptyroom
,